메치니코프와 면역 - 현대 의학의 흐름을 바꾼 위대한 과학자의 열정과 삶
노년학(Gerontology), 죽음학(Thanatology), Orthobiosis(섭생), 발효유 산업, 그리고 자연 면역 이론. 이 모든 것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한 사람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발효유 브랜드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그의 이름은 다름 아닌 일리야 일리치 메치니코프(IlyaI lyich Metchnikoff)다. 그는 빛나는 업적을 이루고 인류에 공헌한 다른 과학자들에 비해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사실 현대 의학의 발전을 논할 때 빼놓아서는 안 되는 인물이다.
엘리 메치니코프라고 불리기도 하는 일리야 일리치 메치니코프는 1845년 러시아제국 말로로시아 지방(현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귀족에 속하는 드보리아네(dvoriane) 계급이었지만,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하다시피 한 아버지로 인해 집안 소유의 땅이 있던 시골에 정착했다. 어린 일리야는 왕성한 지적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고, 겨우 여덟 살 무렵부터 스스로를 학자라 생각하고 형들과 동네 친구들에게 푼돈을 쥐여 주며 자신의 ‘강의’를 듣게 하기도 했다.
크림 전쟁의 패배 이후 러시아제국에서는 변화에 대한 갈망이 커져 갔고, 이를 반영한 듯 사회 전반에 과학과 지식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일리야 역시 과학을 믿고 생명과 존재에 대한 답을 그 안에서 찾고자 했다. 그리고 열다섯 살이 되던 해, 독일어 원서를 번역한 『동물계의 분류와 체계(Classes and Orders of the Animal Kingdom)』에 실린 아메바의 삽화를 보고 자신의 길을 정하게 된다.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생명체를 연구하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인간에게는 너무 깊이 숨겨진 진실을 그런 생명체에게서는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이유였다.
메치니코프와 면역 - 루바 비칸스키 지음, 제효영 옮김/동아엠앤비 |
“엘리 메치니코프는 실험이라는 방법으로 면역의 가장 근본적인 의문을 의식적으로, 결단력 있게 연구한 최초의 인물입니다. 이를 통해 생명체가 병을 일으키는 미생물을 어떻게 물리치는지 밝혀졌습니다.” 1908년, 노벨 생리의학상 시상식에서 카롤린스카 연구소를 이끌던 의학자 칼 모네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그해 수상자는 두 명이었는데, 한 명 독일의 파울 에를리히(Paul Ehrlich)였고 다른 한 사람은 바로 메치니코프였다.
메치니코프는 동물학에서 학자로서의 경력을 시작하여 무척추동물의 비교 발생학이라는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개척하고 수많은 성과를 거두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이런 그라도 느닷없이 병리학에 뛰어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의사도 아니었고, 더구나 당시 의학계를 이끌고 있던 독일이나 프랑스 출신도 아니었으니 상황은 더욱 녹록지 않았다. 더 나은 연구 환경을 찾아 떠난 프랑스 파스퇴르 연구소에서 자리를 잡은 뒤에도, 특히 독일을 본거지로 한 혈청 면역 진영과 오랫동안 서로 꺾고 꺾이는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리고 노벨상을 수상할 당시 면역학 분야의 연구는 사실 에를리히의 혈청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이후로도 메치니코프의 자연 면역 이론은 획득 면역의 뒤로 밀려나 있었다.
2011년, 메치니코프가 살아 있었다면 드디어 오랫동안 참아 왔던 회심의 미소를 지을 일이 일어났다. 노벨 생리의학상이 줄스 호프만(Jules Hoffmann)과 브루스 보이틀러(Bruce Beutler)에게 돌아간 것이다. 톨-유사수용체(Toll-like receptor)의 존재를 발견하여, ‘자연 면역의 활성화 과정을 발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는 것이 선정 이유였다. 호프만은 이렇게 말했다. “현재 자연 면역 연구라 불리는 분야는 메치니코프가 맨 처음 가장 중요한 발길을 내딛었습니다. 그리고 시베리아의 겨울처럼 혹독하고 긴 세월을 지나왔지요.” 20세기가 되어서야 세포를 다루는 방식과 면역의 기본 원리를 분자 단위로 연구할 수 있게 되면서 자연 면역 분야가 다시금 주목받게 된 것이다. 현재 자연 면역과 적응 면역은 서로 상충하는 것이 아니라 양립하는 두 축으로서 우리 면역계를 구성한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해도. 자신이 창시한 분야의 연구로 먼 후배 과학자들이 노벨상을 수상하는 모습을 보았다면, 항상 과학적인 논쟁에서 호전적인 성향을 보였던 메치니코프가 과연 어떤 말을 했을까?